갑자기 ‘실체도 불분명한 좌파단체’의 수장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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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면 4.19 혁명 64주년입니다.

4.19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불법적인 장기집권 시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이었습니다.

4.19에 '건국전쟁' 감독 특강이라니

그런데 최근 놀랄 만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4월 19일에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에서 <영화 '건국전쟁' 감독이 들려주는 현대사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특강이 열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큰사진보기 ▲ 전쟁기념사업회 용산특강 ⓒ 전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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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주제와 강사명을 보고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올해 2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건국1세대들의 희생과 투쟁을 조명한 작품'이라는 미명 아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화와 왜곡된 시각이 담겨져 있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이 6.25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이승만 정권에 협조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 한 극우 인사의 인터뷰를 교차 검증 없이 그대로 삽입하여, 김구 선생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을 가했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4.19혁명의 책임을 은근슬쩍 이기붕과 자유당에 떠넘김으로써 이승만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수백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희생됐다는 여러 증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민간인 사망이 없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승만 정권 당시 벌어진 '백범 김구 암살 사건', '조봉암 사건'을 비롯하여 '보도연맹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4.3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수많은 정적 살해와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일체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전문 역사학자도 아닌, 더군다나 이런 편향된 시각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현대사 특강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혹여라도 대중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지는 않을지 우려스러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게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굳이 <건국전쟁>을 연출한 감독을 섭외했다면, 결국 영화의 기조에 맞춰 강의가 진행될 게 뻔해 보였습니다.

전쟁기념관 측이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강의 날짜가 하필 4월 19일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의 계승'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19혁명의 발발 원인이었던 독재자 이승만을 미화하는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관련 내용으로 4월 19일에 강의를 한다니요. 4.19 혁명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과 당시 희생자들에 대한 조롱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특강 반대 서명운동을 제안하다

적어도 4.19 기념일에 이승만을 미화하는 강의가 진행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서명운동 구글폼을 만들고, 개인 SNS를 통해 '강사 섭외 철회 촉구 서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큰사진보기 ▲ 전쟁기념관 특강 강사 섭외 철회 촉구 서명운동 제안의 글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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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항쟁 기념일에 맞춰 시작된 서명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5주년이 되는 4월 11일까지 진행했고, 이날 오전까지 150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서명에 동참해주었습니다. 문제의식에 공감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한 결과였습니다.

서명운동 소식을 듣고 시민단체 '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대표 안욱현)에서도 연대단체로 힘을 보태주었고, '시민모임 독립' 이사장이신 원로 역사학자 이만열 선생님께서도 "지금 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철회요구 운동을 서명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서명운동 마지막날이었던 11일 오후 한 언론사에서 서명운동 소식을 보도하면서 서명자수가 삽시간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를 본 시민들이 초단위로 계속 서명에 참여하면서 어느새 700명까지 불어났습니다(12일 오전 기준).

결국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전쟁기념관 측에서 4.19 특강을 취소하기로 발표하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전쟁기념관 홈페이지에는 12일 기준으로 '강의 취소 안내' 공지가 올라왔다. 다만, 같은날 나온 KBS와의 인터뷰에서 전쟁기념관 관계자는 "4·19혁명 기념일을 맞아 김 감독 강의를 여는 것이 외부의 오해를 살 여지가 있어 연기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큰사진보기 ▲ 12일 전쟁기념사업회(전쟁기념관) 홈페이지에 올라온 ‘용산특강 제9강 강의 취소’ 공지 ⓒ 전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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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 불분명한 좌파단체라고요?

강의가 불발되자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은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전쟁기념관 용산 특강 취소의 석연치 않은 의혹들'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김 감독은 전쟁기념관의 특강 취소 결정이 4.10 총선에서의 집권 여당의 패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이미 4월 3일부터 한 좌파 시민단체에서 강사 철회 촉구 청원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건국전쟁은 이 전 대통령에 대한 미화와 왜곡된 시각이 반영돼 많은 비판을 받은 작품'이라며 전쟁기념관이 강사 섭외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결과적으로 실체도 불분명한 좌파 시민단체의 요구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전쟁기념관이 백기를 든 꼴입니다. 고작 150명의 서명만으로 공공기관의 업무가 좌지우지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요?" – 김덕영 감독 입장문 중

김 감독이 저격한 '한 좌파 시민단체'는 저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실체도 불분명한 좌파 시민단체의 수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서명운동 당시 저는제 개인의 이름이 아닌'독립로드'라는 이름으로 서명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독립로드는 시민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을 알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이름입니다(@kiqauot).

실체가 불분명하다고 했지만 그동안 1년 넘게 인스타그램을 통해 독립운동가 어록 및 활동, 독립운동 관련 뉴스 등을 공유해왔으며 독립운동 사적지 해설, 순국선열의날 기념 전통활쏘기대회 등의 오프라인 프로그램 역시 꾸준히 개최해왔습니다.

물론 저 혼자 운영하는 계정이고, 정식으로 조직을 구성한 것도 아니기에 단체라는 말에 어폐가 있다고 지적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체도 불분명한 좌파 시민단체'라는 김 감독의 표현은 황당하기만 합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알리고 기리기 위한 활동을 하면 '좌파'가 되는 것입니까? 한편으로 서명운동은 시민들의 정당한 의사표시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마저 폄훼하는 것 같아 유감스럽기만 합니다.
큰사진보기 ▲ 13일 김덕영 감독이 전쟁기념관 특강 취소에 대해 입장문을 발표했다. (김덕영 감독 페이스북 캡쳐) ⓒ 김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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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믿습니다

비록 전쟁기념관 특강은 취소되었으나, 윤석열 정권 출범 후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가 끊임 없이 이뤄지는 현상은 우려스럽기만 합니다.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 국가보훈부의 백선엽 동상 설립, 이승만기념관 건립 추진, 그리고 국방부 산하 기관인 전쟁기념관에서의 이승만 특강 추진까지. 한 사람의 역사학도로서 우리의 역사가 난도질 당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이번 서명운동을 통해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확인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식 서명운동은 끝났지만, 서명운동 링크는 일부러 닫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시시각각 서명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15일 오전 2시 10분 기준으로 무려 1840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서명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렇게 역사를 지키려는 시민들이 있는 한, '역사수정주의' 세력의 의도대로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김덕영 감독님께도 부탁드립니다. 최근 <건국전쟁 2> 제작 소식을 발표하셨습니다. 감독님의 말씀대로 대한민국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고 싶다면, 이승만의 공과 과를 두루 성찰하고 싶다면, 무작정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매도하지 마시고, 그들의 시각도 영화에 균형 있게 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감독님의 특강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 독립로드 SNS 주소: https://www.instagram.com/kia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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